<고종석의 문장>
이 책은 조금 더 진지한 글쓰기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지은이 고종석은 성균관대학교와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했고, 코리아타임스 경제부 기자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가 집필한 ‘언어의 무지개’, ‘문학이라는 놀이’, ‘사소한 것들의 거룩함’등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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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봅시다. 필자는 어떤 여자와 만났다 헤어진 것을 아쉬워하면서 “10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라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뜻일까요? 쉽게 말해서 2차 세계대전이 1939년에, 태평양전쟁이 1941년에 터졌는데 이것이 1929년, 1931년 이렇게 일어났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겁니다. 왜? 그러면 아사코랑 함께 살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것은 글쓴이가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스스로 폭로한 거예요. 자기 자신의 헐벗은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거죠. 내면의 천박함. 그리고 자기가 살았던 역사나 사회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낸 겁니다. 아니, 전쟁이 뭐가 좋다고, 그것도 10년 먼저 터져야 하나요? 두 남녀를 맺어주기 위해 전쟁이 10년 먼저 터져야 하다니요.
피천득 선생은 잘 알려진 스타일리스트입니다. 테크닉이 뛰어나고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타일에서 일가를 이뤘다 해도 그 내용이 천박하면 좋은 글이라 할 수 없습니다. 꼬마 때 읽으면 “와, 이분 글 잘 쓰네”하겠지만 조금만 크면 바로 알게 되죠. “그 메마른 시대, 1920년대에서 1940년대를 이 사람은 저런 헐벗은 내면을 지니고 살았구나”하고요.
스타일만 가지고는 마음의 천박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올바르고 기품 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제일 좋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 천박함을 절대 글에서는 드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격언은 틀린 말이지만, 사람들은 대게 그 글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글로 사람을 판단할 때, 사람들이 스타일보다 더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양식과 동떨어져 있으면, 아무리 스타일이 훌륭해도 독자들은 거기에 혐오감을 지니게 됩니다.
126~127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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